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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정산 상무주암 현기 스님
조현 기자의 休心井 [글고유주소] http://well.hani.co.kr/board/jh_san/224033 삼정산 상무주암 현기 스님 수첩 볼펜 카메라 다 버리자 비로소 ‘죽비’ 선물 죽 한그릇 자비는 덤…“외로움? 좋다,이렇게 좋다” 부끄러웠습니다. 20여년의 고독 속에서 피어난 내면의 빛을 훔치려던 심보가 죄스럽고, 그것을 모조리 기사와 사진으로 담아 내려던 욕심이 부끄러워졌습니다. 저는 지난 몇 해 동안 이름도 자취도 없이 살다 열반해버린 근현대 선지식들의 흔적을 찾아 전국을 떠돌아다녔습니다. 그런 은둔의 선사들을 찾아 산사를 헤매고 마침내 깊은 산사와 암자의 선방과 토굴에서 지금까지 한 번도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숨은 은자’를 발견했을 때의 그 감회란 산삼을 캐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했습니다. 전설이나 신화 속에만 있을 법한 치열하고 자유롭고 자비로웠던 선사들이 불과 20~30년 전에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했다면, 왜 지금이라고 없을 것인가. 다만 우리가 세속의 조미료 향과 중독성 미각에 취해서 무형 무색 무취로 너무도 은은한 그들의 향기를 놓쳐 버렸을뿐인 것은 아닐까. 그 은자가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형일 수도 있다고 확신한 것입니다. 동영상까지 준비해 형상과 그림자, 욕심껏 담으려했던 부끄러움 그래서 마침내 찾아 나선 이가 상무주암의 현기 스님이었습니다. 그는 70년대까지 여러 선방에서 이름깨나 떨치던 선승이었습니다. 그가 어느날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로부터 20여년. 그는 지리산 줄기인 삼정산 1100고지 상무주암에 은둔해 홀로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지난 초행길엔 세상에 한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그를 동영상에까지 담을 동행들도 함께 했습니다. 그 때 마주한 현기 스님의 눈빛은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보되 보지 않는 눈, 형상이 아니라 그림자와 본지를 함께 꿰뚫는 듯이 투명한 눈, 요람처럼 전 존재를 감싸 안는 그런 눈빛을 마주한 순간 오직 형상과 그림자를 욕심껏 담으려던 그 마음이 부끄러워진 것입니다.    수첩·볼펜 하나 없이 다시 암자로… 하여 이번엔 일행들과 함께했던 초행길과는 달랐습니다. 단신으로 올랐습니다. 지리산 삼정산 약수터 옆 길가에 차를 주차시켜놓고 배낭을 들쳐 멨습니다. 배낭엔 초행길의 ‘무례’에 대한 사죄를 담아 스님께 올릴 공양물로 가득 채웠습니다. 그러나 배낭 안엔 수첩이나 볼펜, 카메라는 없었습니다. 이 정도면 기자로선 직무 유기일지 모르지요. 비록 신문사에 아예 휴가를 얻어 가는 길이긴 하지만 본분을 망각했다고도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엇이 인생의 본분사일까요. 걱정도 털고 불안도 털고…오직 디딤발 한발한발에만 집중 가파른 산길을 홀로 한참 오르는데 한 중년 남자가 짐을 실은 지게를 진 채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 역시 상무주암에 가는 길이라면서 “어떻게 우리 스님을 알았느냐”며 신기한 듯 쳐다보았습니다. 알고 보니 경남 함안에 사는 이 거사는...


2008/02/09

3244
(추천: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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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밤> ‘양심냉장고’ 주인공 이종익·김유화 부부의 행복 [1]
10년 만에 다시 만난 ‘양심냉장고’ 주인공 이종익·김유화 부부의 행복 10년 전 겨울, MBC ‘이경규가 간다’ 코너를 통해 한밤중에도 정지선을 정확히 지킨 한 장애인 부부가 감동을 전한 바 있다. 죽을 때까지 양심을 지키겠다던 부부를 10년 만에 다시 만났다. “가난하고 몸 불편한 우리가 이렇게 환하게 웃을 수 있는 이유는…” 1996년 MBC 화제의 코너이던 ‘이경규가 간다-교통질서 지키기’ 에서 정지 신호를 지켜 양심냉장고 1호 주인공이 된 장애인 부부를 기억하시는지. 당시 시각은 새벽 4시, 한적한 여의도 도로에서 수많은 차량이 정지 신호가 켜졌는데도 무시하고 지나가던 정지선을 지킨 그들의 양심은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전해주었다. 그 주인공 이종익(45세)·김유화(43세)씨 부부를 10년 만에 다시 만났다. 장맛비가 계속 내리던 날. 우산을 제대로 들 수조차 없는 부부와 한쪽 어깨에 비를 다 맞으며 엄마 아빠를 위해 우산을 든 두 아들이 스튜디오를 찾았다. 부부는 10년 전보다 살이 조금 붙었지만 여전히 밝은 모습이다. 그동안 단 한 번도 법을 어긴 적이 없냐고 묻자 김씨의 유쾌한 답변이 이어진다. “벌써 10년이나 흘렀네요. 남편이 딱 한 번 속도위반으로 범칙금을 냈어요. 그때 양심에 털 났었죠. 요즘은 CCTV가 많아져 법을 어기면 바로 걸리기 때문에 무서워서 더 양심적으로 살아요.” 방송이 나간 후 그들이 노점에서 근근이 꾸려오던 인형 장사는 사람들의 관심과 도움덕에 잘되었다. 노점 앞을 무심코 지나던 사람들이 알아보고 인형 하나라도 더 사주었다고. 그러나 사람들의 관심은 잠시뿐이었다. 양심적으로 살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좋은 일이 많아야 하는 것이 순리지만 이들 부부의 지난 10년은 그렇지 않았다. 순탄치 않던 지난 10년 어느 정도 생계를 보장하던 노점 인형 장사는 IMF가 닥치면서 접어야 했다. 장애인들이 쉽게 도전하지 못하는 식당을 용기 내어 개업했지만 그 역시 오래가지 못했다. 아무리 씩씩하게 살려고 해도 장애인이라는 현실이 그들을 괴롭혔다. “아는 분에게 어려운 사정을 얘기했더니 용기를 주면서 ‘주방 일을 도와줄 테니 식당을 해보라’고 하셨죠.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저는 카운터, 그분은 주방 일을 하고 남편은 시장에서 필요한 것들을 사 나르면서 열심히 장사를 했어요. 그런데 장사가 생각만큼 잘되지 않았어요.” ‘살림만 하던 주방장의 손맛이 좋지 않아 손님이 오지 않는다’는 그녀와 ‘장애인이 주인이라 장사가 되지 않는다’는 주방장은 서로를 탓했지만 결과 없는 싸움이었다. 주방장을 바꾸면 장사가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새 주방장을 만나봤지만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식당에 김씨가 안 나온다는 약속을 지켜준다면 주방 일을 하겠다고 했다. 부부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했고, 주방장은 오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별수 없이 가게 문을 닫았다. “저희가 ...


2006/08/14

4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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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맨 닥터 리’ 이승복의 성공 스토리
출처 : 레이디 경향 2005-11-09 관련 리뷰가 있습니다. ☞ 기적은 당신 안에 있습니다 (이승복 저) 바로가기 “희망이 에너지이듯 분노 또한 에너지였습니다” 고3 때 미국을 대표하는 올림픽 예비군단의 최고 선수로 인정받은 이승복씨. 그는 훈련 도중 사고를 당해 사지마비 장애인이 됐다. 청천벽력과 같은 절망 속에서도 불굴의 의지를 발휘해 세계 최고의 존스 홉킨스 병원에서 재활의학과 수석 전공의가 된 이승복씨의 성공 신화. 불굴의 의지가 때론 기적을 만든다. 사람들은 흔히 ‘기적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일어난다’라고 생각하지만, 기적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특별한 의지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사지마비 장애를 딛고 존스 홉킨스 병원 재활의학과 수석 전공의가 된 ‘슈퍼맨 닥터 리’ 이승복씨(40)가 우리에게 주는 깨우침이 바로 그것이다. 학창 시절 이승복씨는 촉망받는 체조선수였다. 고3 때 미국 올림픽 예비군단의 최고 선수로 인정받은 그는 UCLA, 미시간대, 스탠퍼드대,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웨스트포인트 군사학교 등 유명 체조팀을 운영하는 대부분의 대학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그런 그가 훈련 도중 사고를 당해 ‘C7-C8 종결 선언’을 받았다. 그것은 일곱번째 경추 아래로 끊어진 신경들이 다시 붙어 살아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뜻으로, 평생 휠체어에서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체조는 나와 가족의 행복과 직결되는 운동 이상의 의미 체조는 그에게 운동 이상의 의미였다. ‘국가대표 체조선수 이승복’에 대한 꿈은 그와 가족의 행복과 직결되는 것이었다. 여덟 살 때 그는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왔다. 약사이던 그의 아버지가 약국 생활을 답답해한데다 당시 가족 이민 붐에 힘입어 이승복씨 가족도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행을 결심했다. 그러나 미국 생활은 그들이 상상하던 것과 너무 달랐다. “한국에서 부족함 없이 자랐지만 부모님은 미국에 가면 더 많은 사랑을 줄 수 있고, 화목한 가정이 될 거라고 했어요. 그런데 막상 가보니까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공장 노동자로 일하는 부모님은 언제나 바빴고, 언어 문제에 인종 차별까지 당해야 하던 저는 어린 나이에 여러 면에서 충격을 받았어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제가 장남으로서 큰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운동선수로 성공하면 부모님의 사랑도 되찾고 한국에서처럼 화목한 가족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절 놀린 미국 아이들의 코도 납작하게 해줄 수 있다고 여겼구요.” 초등학생 시절 체조선수의 경기 장면을 보고 그는 첫눈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그 시절 특히 그에게 감동을 준 체조선수가 루마니아의 나디아 코마네치다. 경기마다 10점 만점을 받는 그녀를 보고 어린 마음에 그는 금메달을 따는 것이야말로 자신과 가족, 고국을 위한 일이라고 확신했다. 올림픽 금메달 획득은 그의 유일한...


2006/02/13

6097
(추천:672)
155
‘죽을 고비’ 덕분에 20대 건강 되찾아
출처 : 한겨레 ■ 심근경색 앓았던 선호균씨 “죽을 고비를 한 번 넘겼다는 생각입니다. 심근경색을 앓은 뒤 건강은 물론 제 삶 자체를 아주 꼼꼼히 챙기게 됐어요.” 한신대 특수대학원 교학과에 근무하는 선호균(49·경기도 군포시 광정동)씨는 6년 전 심근경색이 생겼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처음 증상은 가슴을 짓누르는 통증이었다. 인절미 등으로 점심 식사를 한 뒤 30분쯤 지났을 때라 체한 것으로 여겼다. 대수롭지 않은 소화 불량으로 여겨 손가락을 넣어 토를 해봤으나 통증은 여전했다. 어지럼증도 왔고, 얼굴도 창백해졌다. 집에 돌아온 뒤까지 증상이 계속되자 그는 큰 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심전도를 비롯한 몇 가지 검사 뒤에 심근경색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심장 근육에 피를 공급하는 관상동맥이 세 군데 모두 막혔다는 것이다. 곧장 수술을 통해 관상동맥을 넓혀주고 우회로를 만들었다. “담당 의사가 하늘이 도왔다고 하더군요. 처음 증상 나타난 지 7시간 뒤에 병원을 찾아 살아난 사람은 드물 것이라고 말하더라고요. 퇴원한 뒤에는 다시 태어났다는 마음으로 살기로 했지요.” 선씨는 생활 습관을 완전히 바꿨다. 먼저 직장에서 건강검진 때 피 속의 콜레스테롤 수치와 혈압이 조금 높게 나왔던 것을 교정하기로 마음 먹었다. 운동, 식사 조절, 금연, 금주 등 심근경색을 예방하는 것은 모두 다 실천하기로 했다. 6년 전 관상동맥 수술 뒤 ‘다시 태어난’ 맘으로 10가지 건강습관 실천 이젠 마라톤 도전도 꿈꿔 담배는 당장 끊었다. 술도 소주 한두 잔 정도로 줄였다. 그는 술을 자주 마시지는 않았지만 한번 입에 댔다 하면 폭음을 하곤 했었다. 식단도 청국장과 채소 위주로 바꿨다. 육식을 끊은 것은 아니지만 기름기 많은 음식은 피했다. 밥의 양도 평소보다 반으로 줄였다. 흰 쌀밥은 현미, 콩, 보리 등이 든 잡곡밥으로 바꿨다. 요즘에는 고등어 같은 생선을 잘 챙겨 먹는다. 점심도 집에서 싸갔다. 이 때는 주로 생청국장을 밥 위에 얹어서 먹었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청국장이 없으면 밥을 먹기 싫어질 정도가 됐다. 운동은 특별히 시간을 내는 대신 자동차 운전을 그만 두고 출퇴근 시간에 대중 교통을 이용하면서 걷기를 생활화했다. 출근 시간에만 30~40분은 걸을 수 있었다. 요즘에는 부서를 옮겨 지하철 근방의 사무실로 출퇴근하면서 걷는 시간이 줄었다. 그래서 산을 오른다. 올해부터는 뛰기도 시작했다. 10km 정도는 쉽게 뛸 수 있게 됐다. 뛸 때는 심장 박동을 재는 기계를 착용한다. 맥박 수가 150정도까지 올라가는데, 160을 넘으면 운동량을 줄인다. “담당 의사가 허락한다면 내년에는 단축 마라톤 대회에도 나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신감을 얻었어요.” 식사 조절과 걷기 운동 등으로 1년 만에 몸무게를 70kg에서 10㎏ 줄였다. 체중은 지금도 60㎏을 유지하고 있다. 과체중에서 정상 범위의 몸무게로 오면서 혈압과 피 속의 콜레스테롤 수치도 정상으로 조절됐다. 선씨가 이런 건강 행동을 꾸준히 실천하는 힘은 그의 수첩에서 나온다. 그는 나름대로 필요하다고 여기는 10가지 건강 습관을 만들어 수첩에 적어놓고 실천 여...


2005/12/14

3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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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문준 김숙자 부부
출처 : 인터넷한겨레 ‘늙음도 삶의 일부’ 깨닫는 게 건강비결 ▲ 황문준 김숙자 부부는 규칙적인 운동과 채식 위주의 식단으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은 “고민하지 않고 즐겁게 사는 것이 최고의 건강 비결”이라고 말한다. 황문준·김숙자씨 부부 황문준(70) 김숙자(71·여)씨 부부는 병원이 낯설다. 나이가 들면서 사람들은 몸이 조금만 찌뿌드드하면 병원부터 찾는다. 특별히 아픈 데가 없어도 이 병원 저 한의원을 다닌다. 하지만 황씨 부부는 건강은 스스로 지키는 것이라 생각한다. 최근 황씨가 운동을 하다 발목을 삐어 치료받은 것을 빼면 두 사람은 병원에 가는 일이 거의 없다. 나이가 들면서 찾아오는 노환을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맞고 있다. 병도 삶의 일부라고 여긴다. 다만 건강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정성껏 한다. 꾸준한 운동, 채식 위주의 식사, 그리고 마음을 편안하게 갖기 등이다. 두 사람의 건강법이 똑같지는 않다. 황씨는 매일 새벽 5시30분에 일어나 손바닥과 주먹으로 아랫배를 1천 번 두드린다. 아들이 가르쳐준 운동이다. 소화가 되지 않아 3개월 전부터 시작했다. 안방에는 숫자를 놓치지 않기 위해 1부터 10까지 숫자를 써붙여 놓았다. 100번까지는 1을 쳐다보고, 101번부터는 2를 바라보며 배를 두드린다. “처음에는 배에 멍이 들었습니다. 사흘 째 멍이 사라지고 지금은 소화에 문제가 없어요.”6시부터는 불경을 읽는다. 신자는 아니지만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다. 기도도 한다. ‘만사가 잘된다. 좋아진다. 건강해진다.’는 말을 속으로 되뇐다. 아령, 팔굽혀펴기, 목운동 등도 틈나는 대로 한다. “집에서 죽겠다” 퇴원한 뒤 맘놓으니 암 극복한 아내 독학으로 디스크 고친 남편…“즐겁게 살자” 생각이 보약 김씨는 5시쯤 일어나 부근 석관고등학교 운동장을 걷는다. 걷기를 마친 뒤에는 이웃 주민들과 함께 음악에 맞춰 에어로빅을 한다. 친구들 모임에도 가고 등산도 자주 한다. 장보기는 운동과 나들이를 겸해 경동시장까지 간다. 가능하면 집에 있지 않으려 한다. 운동보다 “마음 편히 대범하게 생각하는 것”을 건강의 비결로 든다. 식사는 콩, 좁쌀, 수수 등 잡곡을 섞은 밥과 야채를 많이 먹는다. 반찬은 싱겁게 하고 된장과 청국장을 자주 먹는다. 생선은 먹지만 고기는 거의 먹지 않는다. 두 사람이 건강에 신경을 쓰게 된 것은 병을 앓고 난 뒤부터다. 부인 김씨는 암을 앓았다. 1991년이었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가다 자궁에서 피가 나와 동네 병원을 거쳐 큰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받았다. 자궁암 4기. 담담 의사는 수술도 불가능한 상태여서 방사선 치료를 해보자고 했다. 입원 뒤 1개월 동안 3차례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더 이상 치료가 불가능했다. 백혈구 수치가 떨어진 뒤 올라오지가 않았다. 임파선이 붓고 입안이 바짝 말라 말도 제대로 못했다. “자고 나면 같은 병실에 있던 사람이 사라지는 겁니다. 죽은 거지요. 죽어도 집에서 살다 죽고 싶었습니다.” 의사의 반대를 무릅쓰고 퇴원했다. 임파선이 부은 것은 몸이 외부 자극에 반응을 할 정도로 아직 몸에 생명력이 남아있다는 뜻이니 집에 가서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는 아들의...


2005/10/23

3186
(추천:539)
153
표명렬 : 진짜 보수는 성조기를 휘날리지 않는다
출처 : 인터넷한겨레 보수 참칭하는 ‘수구 향군’에 대항해 깃발 든 예비역 준장 “빨갱이”라 비난받지만 베트남전 자원한 자칭 ‘건전보수’ 이라크 파병 반대하고 친미·독재 찌든 군대 혁파 외쳐 이재현의 인물로 세상읽기/표명렬 평화재향군인회 상임공동대표 내가 어렸을 때 감명깊게 읽은 책 중에 이원등 상사의 전기가 있다. 책 이름이 뭔지 누가 지었는지는 전혀 기억할 수 없지만, ‘국민’학교 저학년 때에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읽었다. 이원등 상사는 1966년에 공수특전단 고공 낙하훈련 중에 시속 150마일로 하강하던 도중에 동료의 낙하산이 기능 고장을 일으킨 것을 보고는 공중 이동해서 전우의 파일럿슈트를 당겨서 주낙하산을 개방시켜주고 나서 자신은 한강 얼음 위로 추락해버렸다. 그의 전우애와 희생정신을 본받기 위해서 세운 동상이 한강 노들섬 도로 한가운데 서 있는데, 추모곡 의 가사는 이렇다. “하늘을 내 집 삼아 연마한 기술/ 공수단의 자랑은 이것이었다/ 전우의 낙하산을 펴주고 나서/ 유성처럼 사라져간 이원등 상사/ 그대는 하늘에 핀 한 떨기의 꽃/ 길이길이 향기롭게 피어 있어라” 좋은 노래다. 사고 당시 계급은 중사였는데 순직한 다음에 상사로 추서되었다. 어린 ‘국민’이었던 내게 이원등 상사의 거룩한 희생이 준 감동은 너무 강렬한 것이어서, 만약에 내 몸뚱아리 하드웨어의 ‘스펙’, 그러니까 체격이나 체력 등과 같은 ‘제원’이 더 뛰어났더라면 지금 내가 직업군인이 되어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원등 상사의 살신성인 하지만 더 커서 우리 현대사를 공부하면서는 군대와 군인에 대해서 전혀 다른 시각을 갖게 되었다. 극소수 정치군인들이 주도해서 저지른 온갖 악행과 만행에 관한 이야기는 어린 시절에 형성된 그러한 강렬한 기억의 이미지를 대체해버렸다. 군대와 군인에 관한 서로 상반된 이미지들 사이에서 아주 빠른 ‘디졸브’가 벌어진 것이다. 그래서 대학 강의시간에는 학생들에게 “한국 군대는 사람을 망가뜨린다, 어떻게든 군대에 가지 말고 빠져라, 그리고 일단 군대에 끌려가면 하루라도 빨리 탈영해라”는 식으로 농담을 하곤 했다. 그런데, 최근에 다시 생각을 바꾸게 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평화재향군인회(약칭 평군)가 만들어진 것이다. 이미 보도된 대로, 평군의 상임 공동대표로는 표명렬 예비역 준장과 한국전쟁 참전 경력의 74살 노익장이자 부산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상임의장인 김상찬 선생(육군 중사 예편)이 뽑혔고, 장만준 예비역부사관협의회장 등을 포함해서 11명의 공동대표단도 구성되었다. 표명렬 대표는 수락 연설을 통해서 “우리나라에서 안보라는 것은 군사정권 세력들이 안보라는 이름으로 협박해 와서 국민들에게 피해의식으로 남아 있다. 앞으로 안보 하면 생명과 목숨을 바쳐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 희생하는 성스럽고 아름다운 그런 것으로 국민 가슴속에 스며들도록 만들자”고 했다. 민변 대표인 이석태 변호사가 축사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제는 인권과 평화의 가치를 군에서 이뤄낼 수 있고 국가의 방위 임무에 대해 긍지와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장정이 시작된 것이다. 정규 육사 출신으로 정훈감을 지낸 표명렬 대표...


2005/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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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영, 우리시대 논객을 위한 비망록
출처 : 한겨레 http://book.hani.co.kr/kisa/section-paperspcl/book/2005/10/000000000200510131529772.html 커버스토리 지난 9월24일, 정운영 전 논설위원이 타계했다. 각 신문은 부음기사를 실었다. 인터넷에서는 그의 ‘변절’ 여부를 놓고 작은 논쟁이 일었다. 여러 네티즌의 글 속에 애증이 교차했다. 80년대 강단의 정운영, 90년대 의 정운영, 2000년대 의 정운영이 다시 화제에 올랐다. 그가 남긴 흔적 가운데 일부는 여전히 의문 부호로 덮여 있다. 그를 ‘제대로’ 기억하기 위해, 그의 삶 가운데 몇 대목을 짚었다. 이 글은 9월26일치 부음기사의 후속편이다. 완결편은 먼 미래의 일로 돌려둔다. 유려한 문체에 면도칼 논지 큰 키와 깊은 눈의 그가 지난달 홀연 떠났다 뭇사람에게 오해를 남긴 채… #와 정운영 1999년의 일을 두고 ‘한겨레가 정운영을 내쫓았다’거나 ‘정운영이 돈을 좇아 중앙일보로 옮겼다’는 식의 소문이 이미 꽤 퍼져 있다. 1988년 5월15일 창간호 2면에는 ‘본사 발령’ 기사가 있다. 대표이사 송건호, 편집이사 권근술, 그리고 리영희·최일남·김금수·최장집·조영래·정운영 등 9명이 비상임 논설위원 명단에 올랐다. 기라성같은 필진이었다. 정운영은 창간 때부터 를 대표한 경제평론가였다. 당시 권근술 이사를 제외한 전원이 비상임 논설위원이었다. ‘비상임’이란 신문사에 매일 출근하는 정규직 임직원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미 이들 대부분은 다른 경제·사회활동을 ‘병행’하고 있었다. 한겨레 상근 논설위원은 다른 직업을 겸할 수 없다. 외환위기의 충격이 이어진 1999년, 한겨레신문사에서도 긴축경영이 화두였다. 99년 상반기, 신문사는 비상임논설위원들의 ‘수당’을 크게 줄였다. 이들이 기왕에 받았던 원고료 등의 수당은 이미 ‘통념상’ 보잘 것 없는 액수였다. 창간을 함께 했던 이들의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이번 기회에 몇명 남지 않은 비상임위원들을 모두 해촉한다더라’는 소문도 돌았다. 하반기 들어 일부 비상임논설위원들이 스스로 사표를 썼다. 비상임논설위원 가운데 제일 마지막으로 정운영도 사표를 썼다. 의 한 전직 논설위원은 “정 선생을 내친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곤란하다”고 말했다. 회사 안팎의 여러 복잡한 상황은 그를 중심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었고, 그에게만 ‘예외’를 적용하기는 힘들었다는 것이다. 의 한 논설위원은 “그러나 그 배경에 좋지 않은 감정이 작용한 것도 사실”이라고 말했다. 국민주 신문인 한겨레신문사는 정기적으로 대표이사를 사원들의 직접선거로 뽑아왔다. 민주주의는 종종 소모적인 오해와 편견을 낳는다. 정운영은 신문사 밖은 물론 안에서도 여러모로 상징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공식적으로 한겨레신문사를 퇴사한 날은 1999년 12월31일이다. 90년대도 함께 저물었다. #한신대와 정운영 그의 내면에 박힌 상처는 한신대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한신대는 그의 이름 석 자를 한국에 알린 첫 둥지였다. 유학에서 돌아온 그는 1982년 한신대에 자리 잡...


2005/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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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진 - 국과수 여성 법의관
출전 : CBS 노컷뉴스 "유괴로 숨진 아이 부검할때 가장 많이 울어요" 삶과 죽음은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말이 있다. 그러나 유교사상이 뿌리깊은 탓인지 우리나라는 여전히 '망자(亡者)'를 대면하는 것을 금기시한다. 하지만 하루종일 시신을 바라보며 '이 사람은 어떻게 죽었을까'라는 생각만 하는 여자가 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이하 국과수) 법의관 중 유일한 여성인 박혜진(35세)씨가 주인공. 평범한 주부지만 한달에 40건 부검..."냄새날까 구내식당에서만 밥 먹어요" 아침 7시에 일어나 아이들을 깨우고 분주하게 출근 준비를 하는 그녀의 하루는 여느 직장 여성과 똑같이 시작한다. 그러나 국과수로 출근해 그녀가 하는 일은 시신을 부검하고 사인을 밝혀내는 것이다. 한 달에 40건 정도 하는 부검은 대부분 오전에 이뤄진다. 법의관 한 명당 한달에 9번 부검하는 것이 원칙이나 임시조로 편성돼 특별근무하는 일도 다반사다. 부검하는 날은 평소보다 일찍 출근해야하며, 보통 한번에 4건에서 5건의 시신을 부검하는데 세 시간 정도 소요된다. 그녀가 점심시간에 주로 이용하는 식당은 구내식당. “밖에서 먹고 싶어도 부검이 있는 날은 몸에 시신 부패 냄새가 배여서 못 나가요”라고 말한다. 남자들은 간혹 간이 샤워시설에서 씻기도 하지만 국과수 내에 법의관 중 홍일점인 그녀를 위해 마련된 시설은 없었다. “유영철 사건 때는 냄새가 너무 심해서 걸레 빠는 세면대에서 머리를 감기도 했다”고 고충을 털어놨다. 오후에는 혈액, 위 내용물 등 부검만으로 확인할 수 없는 사항에 대해 다른 부서에 검사를 의뢰하고 온라인으로 통보받은 자료를 바탕으로 부검감정서를 작성한다. 보통 한 건당 보름 정도 걸리지만 교통사고나 의료사고 등 복잡한 사건일 경우 한달 넘게 걸리기도 한다. "일때문에 집으로 서류가져갔다 아이들 볼까 두려워 도로 갖고 나온적도 있어요" 밤 9시가 넘어서야 퇴근하는 그녀는 집에서 일을 마저 끝내려는 욕심으로 서류를 들고 가지만 아이들 앞에서 차마 펼칠 수 없는 자료가 많아 고스란히 도로 갖고 온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라고 했다. 그녀의 일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경찰 기관, 사법연수원, 대학 등에서 법의학 강의를 하고, 때로는 증언을 위해 재판에 참석하기도 한다. 우리나라 법정 시스템 상 범인과 함께 법원에 서야하는 그녀는 “칼로 피해자를 찔렀을 범인과 눈을 마주치며 진술을 할 때 무척 괴롭다”고 말한다. 구속기한이나 보험처리 때문에 재촉하는 검찰, 경찰, 유족들 전화를 받는 것도 그녀의 몫. 주 5일제 근무는 그녀와 먼 얘기다. 법의관 인원수는 한정되어 있는데 국과수 분소는 많아지고 매년 부검해야하는 사건은 늘어나기 때문이다. 토요일 근무가 힘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오히려 “우리나라가 3일장을 주로 하잖아요. 토요일에 쉬면 3일장을 넘기게 되니 할 수 없죠” 라고 유족들의 입장을 대변한다. 최근 ‘친절한 금자씨’를 본 후 유...


2005/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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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강봉균
강봉균 『시사인물사전 2』(인물과사상사, 2000년 1월)   편집부   ▲강봉균김영삼 정부의 ‘신경제’ 입안을 거쳐                   ‘김대중 경제’의 사령관으로 맹활약김영삼 정권 말기 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냈던 강봉균이 김대중 정권의 출범과 함께 정책기획수석으로 발탁된 것은 상당히 주목을 끄는 일이었다. 김영삼 정부 밑에서 ‘신경제’를 입안했던 사람을 김대중 대통령이 청와대 비서관으로 기용하리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강봉균은 정책기획수석으로 발탁되기 이...


2005/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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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 이태영
이태영 『시사인물사전 3』(인물과사상사, 2000년 1월)   편집부   ▲이태영(1914∼1998)한국 여성계의 ‘거목’99년 12월 17일 서울 여의도 한국가정법률상담소 6층 강당에서는 한국 여성계의 ‘거목’이라 할 이태영의 1주기 추모식과 흉상 제막식이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이희호 여사, 한승헌 전 감사원장, 이현재 학술원 원장, 윤후정 이화여대 명예총장, 김종철 연합뉴스 사장, 장명수 한국일보 사장 등이 참석했다.이 추모식에서는 이태영의 생전 활동 모습을 담은 『우리시대의 큰 스승, 이태영 선생님』이라는 제목의 기록영화가 상영되는 등 다채로운 행사가 진행되었다. 이 자리에서 이희호는 추모사를 통해 “남편이 일본에서 ...


2005/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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