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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병목 (2006-07-04 09:20:26, Hit : 10643, Vote :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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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자11] 맹자 vs. 고자 ROUND 3
맹자 vs. 고자 ROUND 3

맹자와 고자의 논쟁은 <고자> 편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원문에는 문단 나눔이 없는데 읽기 쉽게 대본처럼 꾸며봤습니다. 맹자와 고자 간의 대화 세 편을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1 버드나무 논쟁

고자 : 본성은 버드나무와 같습니다. 외로움은 버드나무로 만든 나무술잔과 같습니다. 인간의 본성이 어질고 의롭다고 하는 것은 마치 버드나무를 나무술잔으로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맹자 : 당신은 버드나무의 본성을 따라서 나무술잔을 만든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버드나무의 본성을 해쳐서 나무술잔을 만든다고 생각합니까? 만약 버드나무의 본성을 해쳐서 나무술잔을 만든다고 본다면 또한 사람의 본성을 해쳐서 어질고 의롭게 된다고 보는 겁니까? 천하 사람들을 이끌고서 어짊과 의로움을 해치는 것이 분명 그대의 말일 것입니다.


고자가 묻고 맹자가 반박하면서 끝납니다. 마치 맹자의 말로 논쟁이 종결된 것처럼. 과연 그럴까요? 공자를 잇는 적통 맹자라는 권위를 벗어버리고 냉정하게 살펴봅시다.

고자는 버드나무 자체와 나무술잔 사이의 관계를 인간 본성과 인의|仁義|의 관계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고자는 자연스러운 본성 - 버드나무 - 과 인위적으로 변형해서 만들어진 것 - 나무술잔 - 은 전혀 그 성질이 다르다고 보고 있습니다. 곧 원래의 삶의 모습과 유가에서 말하는 인의|仁義|라는 가치 덕목과의 관계를 대립적이며 갈등적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에 반해 맹자는 그 둘의 관계를 조화와 보충의 관계로 보고 있습니다. 비록 목공이 의도적으로 버드나무를 베고 가공하여 나무술잔을 만들었지만, 그 술잔은 버드나무의 타고난 본성을 전혀 해치지 않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반박하고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보자면 아직 미완성된 문장입니다. 그 본성을 전혀 해치지 않았다는 근거가 아직 없습니다. 그러나 맹자는 한발 더 나아가, 나무의 본성을 해쳐서 술잔을 만들었다면 사람의 본성을 해쳐서 어질고 의롭게 되었냐고 반문합니다. 어투로 보면 따지거나 다그치듯 합니다. 그러고는 당신의 그런 말이야 말로 천하 사람의 어짊과 의로움을 해치는 것이라고 결론 내립니다.

#2 소용돌이치는 물 논쟁

고자 : 본성은 소용돌이치는 물과도 같아서, 동쪽으로 터주면 동쪽으로 흘러가고, 서쪽으로 터주면 서쪽으로 흘러갑니다. 사람의 본성에 선과 불선의 구분이 없는 것은 물에 동과 서의 구분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맹자 : 물에 진정 동서의 구분은 없지만 위아래의 구분도 없겠습니까? 사람의 본성이 선한 것은 물이 아래로 흘러가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은 선하지 않음이 없고, 물은 아래로 흘러가지 않는 경우가 없습니다. 지금 물을 쳐서 튀게 하면 이마를 지나가게 할 수 있고, 세차게 밀어 보내면 산 위에도 있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어찌 물의 본성이겠습니까? 그 형세가 그런 것일 뿐입니다. 사람을 선하지 않게 할 수도 있지만, 그 본성은 또한 이와 같을 뿐입니다.


이번에도 고자가 먼저 말을 꺼냅니다. 인간이 본성은 소용돌이치는 물과 같아서 어디로 흐를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 물을 동쪽으로 터주면 동쪽으로 가고, 서쪽으로 터주면 서쪽으로 가듯이 사람의 본성이 처음부터 선하고 악한 것은 없다는 주장입니다. 소용돌이치는 물이라는 것은 어느 쪽으로도 갈 수 있는, 비록 고여 있기는 하지만 그 자체가 매우 유동적인 상태를 뜻합니다.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는 모든 성질을 갖추고 있지만, 원래부터 선하다 악하다라고 미리 단정할 수는 없다고 본 것입니다. 이러한 고자가 보기에 맹자의 주장은 어떤 결과를 두고 그것이 마치 본성인 양 주장하는 것처럼 비쳤습니다. 즉, 사람이 선할 수도 있고 악할 수도 있는데 선한 그 결과에만 주목해서 마치 태어날 때부터 그랬던 것처럼 오해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맹자의 반론은 물이 어느 쪽으로 흘러갈지는 알 수 없으나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만은 분명한데, 사람의 마음이 선한 것은 바로 이와 같다고 합니다. 억지로 물을 튀겨 위로 오르게 할 수 있으나 물의 본성이 아니듯이, 사람이 비록 악할 수도 있으나 본성이 그러한 것은 아니라고 보충 설명을 합니다.

#3 개와 소의 본성

고자 : 태어난 그대로를 본성이라고 합니다.
맹자 : 태어난 그대로를 본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흰 것을 희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까?
고자 : 그렇습니다.
맹자 : 흰 깃털이 흰 것은 흰 눈이 흰 것과 같고, 흰 눈이 흰 것은 흰 옥이 흰 것과 같은 것입니까?
고자 : 그렇습니다.
맹자 : 그렇다면 개의 본성이 소의 본성과 같고, 소의 본성은 사람의 본성과 같은 것입니까?


이번에도 먼저 고자가 말을 꺼냅니다. 고자가 문제 제기를 하면 맹자가 결론을 내는 형식입니다. 위 대화는 본성|本性|이라는 말에 대한 두 사람의 차이를 보여줍니다. 먼저 고자는 본성을 태어난 그대로의 모습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반면 맹자는 태어난 그대로의 모습 중에서 사람과 다른 동물을 구분해주는 고유한 특징을 본성이라고 본 것입니다.

어이없게도 지금까지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본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본성이란 타고난 본디의 성질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고자가 말한 원래의 모습이 본성이라는 말뜻에는 더욱 가깝습니다. 그러나 사람이나 동물이나 살기 위해 먹는다는 점에서는 동일한데, 그렇다면 사람이나 동물이나 본성이 똑같다는 결론이 납니다. 이에 따르면 개나 소나 사람이나 모두 본성이 같다는 말도 할 수 있습니다. 이 말 때문에 맹자는 화가 난 겁니다. 맹자가 보기에 고자의 말은 모든 종들의 본성을 똑같은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궤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큰 소리로 한 마디 한 것입니다. “그러면 개의 본성이 소의 본성이고, 소의 본성이 사람의 본성이란 말이냐?”

(내일 이어집니다...)

본성
참 읽기 편한 글입니다.
또 내용에서도 빠르게 읽을 수 있는 요약본만 존재하는
요즘에 보기드문 좋은자료라고 생각됩니다
 2014/06/15 14:30:10   

감사해요
잘이해가되네요 잘봤습니다.  2015/11/11 16:4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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