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members.net 아카이브 · 2002–2009

손병목의 독서노트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10권 세트)

살다보면 부끄러울 때가 참 많습니다. 공자는 부끄러움을 아는 사회라야 제대로 된 사회라고 보았습니다. 굳이 사회를 말하기 전에 한 개인을 놓고 보더라도 부끄러움은 종종 자기 발전의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만화 《조선왕조실록》을 펴내고 있는 박시백은, 사극을 재미있게 보다가 관련한 지식이 너무도 부족한 자신을 발견하고는 조선사에 대한 공부를 했다고 합니다. 빈약한 역사 지식이 부끄러웠던 거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대하역사만화 《조선왕조실록》 시리즈를 펴내고 있습니다.

저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작년에 출간했던 《동양고전강의》도 결국은 부끄럽고 부족한 제 지식을 조금이라도 채우기 위해, 오직 저 스스로를 위해 썼던 책입니다. 이 독서 메일의 출발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하지만 어렸을 때 미처 책을 많이 읽지 못한 탓에 빈 깡통처럼 덜그덕거리는 제 머릿속이 부끄러워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알기 때문에 쓰는 것이 아니라 몰랐기 때문에 알기 위해서 씁니다. 경험적으로 볼 때 최고의 공부는 글을 쓰는 것입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은 역사에 대한 저자의 무지를 고백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공부하다보니 만화로 그리면 재미있겠다 싶어 신문사를 그만두고 조선왕조실록 CD를 구해 공부하는 이야기를 머리말에 쓰고 있습니다.


   제   목 : 조선왕조실록 (10권 세트)
   지은이 : 박시백
   펴낸곳 : 휴머니스트 / ₩98,500

한 권 한 권 나올 때마다 꼭 한번 읽어봐야지 생각하고 미룬 게 벌써 2년, 최근에 10권 세트가 출간되었다길래 이때다 싶어 지난 주말에 구해 읽었습니다. (아직 미완간 상태입니다. 20권 예정 중 10권까지 출간되었습니다.)

저는 이런 책을 보면 참 고맙습니다. 제 눈높이에 맞으니까요. 얼기설기 어설프고 천박했던 제 역사 지식을 빠르게 정리할 기회가 되었습니다. 실록의 기록을 위주로 했지만 관련 자료를 공부하여 얻은 저자 자신의 해석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실감나고 재미가 있습니다. 모르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 자체가 이미 재미있지만, 거기에 만화 특유의 재미가 더해져 즐거움이 배가 되었습니다.

지식은 자신이 체득한 만큼만 유효합니다. 전문서적을 읽고 10%도 채 이해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비교적 쉬운 책으로 책 전체 내용을 완전히 소화하는 것이 훨씬 효과적입니다. 책을 읽을 수 있는 환경과 기존 지식의 수준을 고려하지 않고 무턱대고 '좋은' 책을 읽다보면 소화불량에 걸릴 가능성이 큽니다. 저에게는 이 정도 책이 딱입니다!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이 사단칠정 논쟁을 벌일 때 남명 조식은 이를 한심하게 바라봤습니다. 이미 옛 성현들이 다 밝혀놓았는데 뭐 덧붙일게 있다고 그리들 요란한지, 후학인 우리는 그저 힘써 체득하고 실천하면 되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맞는 말입니다. 그리고 조식 선생은 허황한 이론보다는 실천을 강조하기 위해 그렇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옛 성현들이 다 밝혀 놓았음을 깨달은 것은 남명 조식 스스로 이미 엄청난 공부를 하고 난 후였습니다. 누구나 그처럼 공부를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후학들을 위해 좀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해준다면 더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을 하면서 자기와 남을 이롭게 하는 행위를 보살행이라고 합니다. 어려운 지식을 쉽게 만들어 널리 퍼뜨리는 것도 어쩌면 보살행일지 모릅니다. 책을 쓰는 사람, 그리고 만드는 사람 모두가 말입니다.

부록

column20070720_s.jpg
column20070720_s.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