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members.net 아카이브 · 2002–2009

손병목의 독서노트

황광우의 철학콘서트

책을 소개할 때는 책 내용만 따져 좋고 나쁨을 가려야 합니다. 그러나 실상 그러하지 못합니다. 그 책을 쓴 사람이 누구냐가 책의 잠정적 품질을 결정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어찌 보면 불합리합니다. 그러나 저도 이런 방식을 많이 취하게 됩니다.  서점에서 책을 집어들 때 목차와 더불어 머릿말과 저자 소개를 맨 먼저 봅니다. 대개의 경우 책 구매 여부는 이 순간에 결정됩니다.

서점에서 반가운 이름을 만났습니다. 황광우.
처음에는 누군가 했습니다. 황지우 시인과 이름이 비슷하다 여겼는데, 맞습니다. 황지우 시인의 동생이었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 그가 예전에 정인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했던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대학 다닐 때 그의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 '들어라 역사의 외침을', '뗏목을 이고 가는 사람들' 따위입니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 나지 않지만 필명만은 또렷하게 기억이 납니다.
오랜만에 기억을 살려 그의 옛책을 추억해 봅니다.

《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 : 사실 거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아마도 한 사람의 글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글을 모아 펴냈던 것 같습니다. 제목을 봐서는 빈곤의 이유를 사회구조적으로 파헤친다는 느낌이 드는데, 정말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들어라 역사의 외침을》 : 이건 아마 역사서였던 것 같습니다. 조선 후기부터 근현대사까지 다룬, 아마도 흔한 말로 '민중사관'의 관점에서 풀어쓴 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뗏목을 이고 가는 사람들》 : 뗏목은 강을 건널 때만 필요한 것, 강을 건너고도 그것을 이고 가는 사람에 대한 비꼼이었던 듯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며 진리를 찾으려 했던 이들, 그러니까 오늘 소개할 《철학콘서트》에서도 다루고 있는 예수, 석가, 공자, 마르크스와 같은 사람들을 다루었던 것 같습니다.
(책장을 뒤져봤는데, 이 책들 중 단 한 권도 남아있지 않습니다.ㅠㅠ)

이들 책에 비해서 《철학콘서트》는 말랑말랑합니다. 제목부터 무당파적(?)입니다. 당파적이라는 말은 흔히 안 좋은 어감입니다만, 사실 모든 진보는 당파적입니다. 타워팰리스에서 쪽방촌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진보는 현실에는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보든 보수든 당파적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당파성은 고사하고 제목부터 표절(?)입니다. 정재승의 《과학 콘서트》에서 따왔습니다. 《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 《들어라 역사의 외침을》에 비하면 격세지감을 느끼게 됩니다. 동일한 저자의 다른 책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내용은 어떠한가?
청소년용입니다. 따라서 쉽습니다.

이렇게만 얘기하면 오해하기 십상입니다. 청소년용이라는 말에 먼저 색안경을 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분들은 요즘 나오는 청소년용 도서를 한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어른들(?)을 위한 도서보다 훨씬 훌륭한 책들이 많습니다. 물론 내공이 풍부한 저자의 책을 골라야 합니다. 삶이 모든 분야에 정통할 수 없듯이, 개인의 지식도 모든 영역에 골고루 박학다식할 수는 없습니다. 이럴 때 해당 분야의 입문서로서 청소년용 도서는 큰 역할을 합니다. 제대로 된 청소년용 도서는 원전을 꼭 읽어보고 싶게 만듭니다. 《철학 콘서트》, 이 책이 바로 그러합니다.


   제   목 : 철학 콘서트
   지은이 : 황광우
   펴낸곳 : 웅진지식하우스(초판 출간일 2006.6.28)/ 2006.8.9일刊 초판 8쇄를 읽음/ 값 12,000원

10명의 위대한 인물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첫장을 넘기면 바로 소크라테스가 나옵니다. 오로지 진리만을 추구하다 담담히 죽음을 맞이하는 소크라테스를 맨앞에 배치한 이유는 저자의 프롤로그를 통해 살짝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플라톤의 《국가》를 읽기 전에 나는 《소크라테스의 변명》과 《향연》을 먼저 읽어야 옳았다. 철학 하는 일만 그만두면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제안을 거부하고 독배를 마시면서까지 철학의 자유를 옹호한 소크라테스, 그의 삶에 내재된 긴장을 먼저 더듬어야 옳았다."

소크라테스에 이어 플라톤의 《국가》, 석가의 《반야바라밀다심경》, 공자의 《논어》, 예수의 《성서》, 퇴계 이황의 《성학십도》, 토머스모어의 《유토피아》, 애덤스미스의 《국부론》,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 노자의 《도덕경》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제목에서 어떠한 편향이 느껴지지 않듯 내용 역시 편협한 관점을 거부합니다. 케케묵은 인상의 공자로부터 진리를 알 수만 있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열정을, 고리타분한 노인네같은 퇴계 이황으로부터는 진리에 대한 논쟁이라면 아무리 어린 제자라도 깍뜻하게 존대했던 대인의 풍모를 그려냅니다. 과학적 사회주의에 반해 늘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던 《유토피아》를 '제대로' 읽게 만들며, 애덤스미스의 《국부론》으로부터 '행복의 경제학'으로의 발전 가능성을 끄집어 냅니다.

그러나 이 책, 어설픈 양시론(兩是論)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마치 무당파적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그의 논리 속에 철저하게 당파적인 것이 숨어 있으니, 바로 여기서 저자의 심오한 내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각각의 이야기는 그리 길지 않습니다. 마치 한편의 칼럼을 보듯, 수필을 읽듯 짧은 시간에 쉽게 읽을 만한 내용입니다.
주위에 청소년 - 중학생부터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 이 있다면 이 책 한 권 꼭 선물해보세요. 그러나 그 전에, 꼭 먼저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재미있으니까요^^

부록

column20061120_s.jpg
column20061120_s.jpg

댓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