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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목의 독서노트

오정희 산문집 - 내 마음의 무늬

나이가 듦에 따라 새삼스레 가슴에 와닿는 단어가 있습니다. 20대에는 '치열함'이라는 단어를 가슴에 안고 산 것 같습니다. 30대 초에는 '열정'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 듯합니다.

요즘 저는 '통찰', '성찰'이라는 단어가 주는 묘한 매력을 느끼고 있습니다.
제대로 살고, 제대로 고민하고, 제대로 부딪쳐보고, 한편으로는 몇 걸음 멀찍이서 관조한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삶에 대한 지혜 - 진지한 성찰(省察)과 인생에 대한 통찰(洞察) - 이 담긴 글을 발견할 때마다 가슴이 서늘해지는 오묘함을 느낍니다.

소설가 오정희님이 "육신이 늙어갈수록 눈길과 마음 닿는 모든 것이 경이롭고 신선해진다"는 아이러니를 말하는 것도, 결국은 늙음에 따른 삶의 통찰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   목 : 내 마음의 무늬
   지은이 : 오정희
   펴낸곳 : 황금부엉이(초판 출간일 2006.1.5)/2006.1.25일刊 초판 4쇄를 읽음/ 값 9,500원

오정희님의 산문집 《내 마음의 무늬》를 읽었습니다.
우연히 읽은 그녀의 글은 통찰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게 합니다. "당연지사로 여기며 무심했던 일들, 범상한 것에서 범상치 않은 의미를 알게 되고 사소한 것들의 소중함과 그 의미를 놀랍고 새롭고 신기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 육신의 늙음에서 비롯되는 것"임을 깨달은 그녀는, 나이 먹고 죽어가는 것도 그다지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아직 저는 이 말을 표면적으로밖에 이해하지 못하지만, 인생의 각 시기를 회상하는 그녀의 글을 통해, 아마 나 역시 훗날 그녀와 같은 생각을 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생깁니다.

그녀는 20대를 이렇게 말합니다.
"하루하루를 생의 첫날이나 마지막 날처럼 새롭고 치열하게 살고 싶다는 열망과 높은 목표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내일을 담보로 한 유예일 뿐, 남루하고 권태로운 일상의 되풀이임에 절망하며 방만하고 무위한 공상으로 날밤을 새우는 날들" - 이 글을 읽다 순간 가슴이 멎는 듯했습니다. 내가 나의 20대를 표현한다 해도 이 이상 쓸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룻밤에 일생의 계획을 거창하게 세우지만 정작 하루의 계획은 실행하지 못하고 창조적인 삶, 불꽃처럼 뜨겁고 치열한 삶을 원하면서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젊음이 주체스러운 한편 준비 없이 맞을 미래에의 두려움, 중요한 시기에 시간을 낭비하고 소모하고 있다는 초조감에 쫓기는 시절."

아, 글을 잘 쓰는 건 정말 큰 복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치열하되 어설픈 나의, 아니 우리의 20대를 어찌 저처럼 표현할 수 있을까요.

그녀의 글은 30대로 이어집니다.
"뻔뻔함과 교활함을 습관처럼 익히며 그렇게 자신 있게 경멸하던 '속물스러움'은 '생활'이라는 이름으로, 절대가치는 상대가치로 변모한다."
"높은 산 정상에 올라 있음으로 표현하기도 하는 30대의 끝머리, 때로 감지되는 희미한 조락의 그림자에, 모험과 도전과 일탈이 허용되지 않는 정해진 길을 충실히 가야 하는 자의 쓸쓸함과 아쉬움이 없을 것인가."

마흔.
"40대가 되면 찾아올 거라고 기대했던 평화도 안도감도 앎도 없이 막다른 골목에 맞닥뜨린 듯 어리둥절하고 당황스럽니다.
간혹 자신의 생활이 벗어날 길 없는 튼튼한 덫으로 느껴지고, 현재의 삶에 별다른 불평이나 불만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때때로 남몰래 자기 실종의 욕구와 충동을 느끼며 이곳이 아닌 저곳을 꿈꾸고 조금은 다른 역할을 해보고 싶거나, 나아가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고 싶다는 욕구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출발은 다를 바 없건만 이미 속한 세계도, 성취도 확연히 달라진 친구들을 보며 새삼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에 가슴앓이를 하기도 한다."

쉰.
"아이들의 성장 속도란 바로 내게서부터 떠나는 속도와 비례한다는 것, 이젠 애착과 집착을 갖는 것으로부터 (어찌 자식뿐이겠는가) 꽉 쥔 손을 풀어야 할 때라는 것, 한껏 비운 손이 충만이고 놓음이 진정한 소유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허전함과 쓸쓸함을 얼마나 더 견디고 겪어야 해방되는 거냐고, 종내 그런 평온이 오기는 오는 것이냐고 물으니 어머니는 그런 게 인생이라고 담담하게 말씀하신다."

예순.
"인생은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게되는 것이 성숙이라고 한다면, 인간이 나이에 따라 성숙하는 존재라면 그 이해할 수 없음과 모순과 불합리성을 조용히 수락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60대가 아닐까."

인간적인 품위를 지키며 좋게 나이 들어가는 노인들은 뒤따라 늙어가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위안을 줍니다.
오정희님의 글을 읽으며, 늙어감이 거죽의 헤짐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깨닫고, 비록 가슴 서늘하지만, 가진 것을 놓고 사라짐을 마음으로 수용하는 준비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랜만에 가슴이 차오르는 글을 읽었습니다.


*
위에서 글 잘 쓰는 건 정말 큰 복이라고 말했는데, 글쓰기의 고통을 말하는 다른 또 다른 글을 읽고나니, 속 좁은 표현 같아 부끄럽습니다. 〈소설 쓰기, 소설 짓기〉라는 글을 보면 비록 짧은 문장일지라도 그녀에게 그것은 때론 뼈을 깎는 고통일 수도 있다는 것을 실감나게 알 수 있었습니다.  
일찍이 이태준이 "명문이나 명화 치고 일필휘지해서 되는 것은 자고로 하나도 없을 것이다."라고 말한 그대로입니다.

* 책 날개에 소개된 작가 오정희

1947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대학 2학년 때인 196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완구점 여인〉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1979년 〈저녁의 게임〉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이래 동인문학상, 동서문학상, 오영수문학상 등 주요 문학상을 수상하며 박완서 등과 더불어 한국 최고의 여성 소설가로 군림했다. 2003년에는 독일에서 번역 출간된 『새』로 독일의 주요 문학상 중 하나인 리베라투르상을 수상했는데, 이는 해외에서 한국인이 문학상을 받은 최초의 사례로서 한국문학의 해외 진출사에서 매우 의미 깊은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1990년대 말 모 일간지에서 문학평론가 33인을 대상으로 ‘한국문학 50년 최고의 작품 50’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황순원, 이문열 등과 함께 가장 많은 3개의 작품(〈유년의 뜰〉〈동경〉〈저녁의 게임〉)이 선정될 만큼 그의 문학사적 위치는 독보적이다. 특히 그는 내면 지향적인 주제의식과 문체미학으로 신경숙, 전경린, 조경란, 하성란, 윤성희 등 수많은 후배 소설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지금도 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그의 글은 소설 미학의 전범을 따라 배울 수 있는 ‘교과서’ 그 자체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창작집 『불의 강』『유년의 뜰』『바람의 넋』『불꽃놀이』, 장편소설 『새』, 동화 『송이야 문을 열면 아침이란다』 등이 있다.

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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