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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목의 독서노트

퇴계 이황의 도산잡영(陶山雜詠)

지난 7월에 최인호의 《유림》을 통해 퇴계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인간적인' 퇴계에 대해 흥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특히 퇴계와 두향에 대한 이야기, 매화 이야기를 통해 퇴계의 사람됨을 짐작할 수 있었는데, 기대승과의 사칠논변(四七論辯)과 같은 근엄한 철학자이자 깐깐한 유학자의 이미지를 벗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유림》 3권 '군자유종君子有終'은 퇴계 이황에 대한 이야기인데, 여기서 처음 《도산잡영》에 대해 들은 바가 있습니다. 3권 마지막 장 〈추로지향鄒魯之鄕〉은 끝 부분을 그대로 옮겨 보겠습니다.

마부는 말을 끌고 왔다. 퇴계는 말위에 올라탔다. 종자는 행장을 꾸려들고 마부는 앞장서서 죽령고개를 내려가기 시작하였다.
쩔렁쩔렁.
말모가지에 매달린 삼환령이 방울 소리를 내며 울었다.
'나는 이제 갈 것이다.'
말위에 올라 앉아 퇴계는 결심하였다.
'공자가 살았던 노나라와 맹자가 살았던 추나라의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다. 추로지향으로 돌아가 맹자를 비롯한 도학군자와 주자를 비롯한 홍유석학들을 만날 것이다. 추로지향으로 가는 길에는 이제 아무런 걸림돌이 없을 것이다. 설혹 추상과 같은 주상의 어명이라 할지라도 내가 가는 길을 막아 세우지는 못할 것이다.'
퇴계를 태운 말은 우쭐우쭐 죽령고개를 타고 추노지향을 향해 내려갔다. 또한 퇴계는 수사(洙泗)와 낙민(洛閔)을 찾아가고 있음이었다.
수사는 공자가 살았던 ‘수수(洙水)’와 ‘사수(泗水)’에서 나온 말이고,‘낙민’은 정자가 살던 ‘낙수(洛水)’와 주자가 살았던 ‘민(閔)’땅의 지명이 합쳐져서 생긴 말. 퇴계는 공자가 태어난 노나라와 맹자가 태어난 추나라뿐 아니라 정자를 키운 낙수의 강과 주자가 살았던 민땅을 찾아 제2의 출가행을 단행하였던 것이다.
결론적이지만 이로써 퇴계가 태어난 고향 온계(溫溪)는 퇴계(退溪)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이로써 퇴계는 이황(李滉)의 호가 되는 것이다. 퇴계라는 호가 암시하듯 ‘은둔하여 물러서는 삶’으로 극적인 탈바꿈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뿐인가.
퇴계를 낳은 안동은 조선의 ‘추로지향’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은 퇴계가 자신이 살던 도산(陶山)남쪽에 서당을 짓기로 결심하고 읊은 시에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퇴계는 직접 쓴 《도산잡영(陶山雜詠)》 속에서 ‘영지산의 한줄기가 동쪽으로 나와 도산이 되었는데 혹자는 말하기를 산이 또 이루어졌기 때문에 도산이라고 명명하였다고 하고, 혹자는 말하기를 산속에 질그릇 가마터가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사실을 가지고 이름을 붙인 것이라 한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퇴계는 바로 이 곳 도산이 서당을 고쳐지을 명당임을 깨닫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짓는 것이다.

    계상서당에 비바람 부니
    침상조차 가려주지 못하여
    거처 옮기려고 빼어난 곳을 찾아
    숲과 언덕을 누볐네.
    어찌 알았으리, 백년토록
    마음 두고 학문 닦을 땅이
    바로 평소에 나무하고
    고기 낚던 곳 곁에 있는 줄이야
    風雨溪堂不庇床
    卜遷求勝徧林岡
    那知百歲藏修地
    只在平生采釣榜
퇴계의 이 시는 ‘봄을 찾아 헤매다가 집으로 돌아와 뜰에 핀 매화꽃을 보니 바로 그곳에 봄이 와 있다.’고 노래한 옛 선시를 떠올리게 한다.
퇴계는 이처럼 자신이 나무하고 고기 잡던 고향이 바로 추노지향이자 낙민의 땅임을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안동이 오늘날 조선의 ‘추노지향’으로 불리는 것은 이처럼 퇴계가 세운 도산서원으로부터 뻗어 내린 유림의 숲 때문일 것이다. 3권 끝.



   제   목 : 도산잡영
   지은이 : 이황 / 이장우,장세후 옮김
   펴낸곳 : 을유문화사 (초판 출간일 2005.2.28 / 초판 1쇄를 읽음) ₩13,000

《도산잡영》은 퇴계가 57세부터 66세까지 약 10년 동안 쓴 시중에서 도산서당 안팎에서 지은 시를 모아 둔 것입니다. '도산잡영'이라는 말은 "도산(서당)에서 이것저것 생각나는 대로 시로 읊는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퇴계의 시만 약 3,000 수에 가까운데, 《도산잡영》에는 40題 92首가 담겨 있습니다. 《유림》에서 인용한 위 시는 《도산잡영》의 맨 첫 수이고, 제목은 '서당을 고쳐 지을 땅을 도산 남쪽에서 얻다改卜書堂得地於陶山南洞'입니다.

퇴계의 《도산잡영》을 논하기 전에, 이를 우리말로 풀이하고 주석을 달아 놓은 이 책 자체만으로도 느끼는 바가 많았습니다. 예전에 책을 만드는 것을 주업으로 삼을 때가 있었는데, 이 책을 보면서 그런 과거가 부끄러워졌습니다.
책은 이와 같이 만들어야 한다는 전범典範을 보는 듯했습니다. 정성이 느껴지는 우리말 풀이와 꼼꼼한 주석, 운문을 다시 산문으로 풀어 그 뜻을 정확하게 전달하고자 한 역자의 노력을 통해 책이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퇴계의 시는, 그 당시 한시들이 대개 그러했겠지만, 각운을 맞추고 중국의 여러 고서를 인용하거나 빗대어 표현한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역자는 각주를 통해 시에 쓰인 단어와 문장 하나하나의 유래를 모두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만한 책이면 충분히 소장 가치가 있습니다. 신문을 통해 안 사실이지만,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본문 인쇄상 사소한 오류가 발견되자 서점에 전시된 모든 책을 수거해 다시 제작해서 내놓았다고 합니다. 마음이 숙연해지기까지 합니다.

다시 책으로 돌아와, 《도산잡영》을 통해 본 퇴계의 말년은 참으로 행복해 보입니다. 벼슬을 등지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자연과 벗하여 학문에 정진하고자 했던 꿈을 이루어가고 있는 과정의 글들이라 그런가 봅니다. 또한 자연과 한몸이 되니 그 마음이 신선과도 같아, 유학자로서 겉으로는 노장을 멀리하는 듯하지만, 마음은 노장의 그것과 다르지 않음도 알 수 있습니다. 몇 편의 시에서는 노장의 글을 그대로 인용한 구절도 보입니다.
자다가 문득 홀로 일어나서도 행복함에 젖습니다.

    산 비어 온 방 고요한데,
    밤 되니 추워져 서리 기운 높네.
    외로운 베개맡에 잠 이룰 수 없어,
    일어나 앉아 옷깃 여미네.
    늙은 눈에 가는 글자 보자니,
    짧은 등불 번거로이 자주 심지 돋우네.
    책 가운데 참된 맛 있어,
    실컷 먹으니 진귀한 요리보다 낫네.
    (...)

《도산잡영》을 읽고 《유림》 3권을 다시 보았습니다. 처음 읽을 때 보이지 않았던 구절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퇴계의 사람됨에 다시 반하게 되었고, 그의 노력을 조금이나마 따라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습니다.

마음을 다잡을 겸, 젊은 날의 퇴계를 그리고 있는 원문을, 길지만 그대로 옮겨 싣는 것으로 제 마음을 대신할까 합니다.

12살 때 《논어》에 나오는 '리(理)' 자의 화두를 얻음으로써 문리(文理)를 터득한 퇴계는 오직 14년 동안 스승이나 벗도 없이 혼자서 거경궁리하였던 것이다.
퇴계는 이를 지경(持敬)이라고도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일종의 불교에서 말하는 선(禪)과 같은 것이었다.
즉 몸과 마음을 일심으로 몰두하여 밥을 먹을 때는 밥을 먹을 뿐이며, 잠을 잘 때는 오직 잠을 자는 일에만 열중하는 참선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을 분산시키고 정신을 산만하게 하는 잡다한 일에서 벗어나 마음을 단순화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방법이었다.
이에 대해 퇴계는 다음과 같이 말을 하고 있다.
“화려하고 시끄럽게 떠드는 일은 사람의 마음을 가장 쉽게 빠져들게 한다. 나는 일찍부터 여기에 힘을 써서 이러한 일에 거의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퇴계의 고백은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일찍이 의정부의 사인(舍人)이 되어 노래하는 기생이 눈앞에 가득하였을 때 문득 한 가닥 환희심이 일어나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기미(機微)는 살고 죽는 갈림길이니,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것인가.”
이 말은 단순한 것 같지만 실은 의미심장하다.
퇴계는 ‘화려하고 시끄럽게 쾌락에 빠지는 것’과 ‘그것에 초연할 수 있는 평상심’을 ‘살고 죽는 생사의 갈림길(機則生死路頭也)’로 보고 있음인 것이다.
특히 퇴계는 술을 경계하고 있었다.
일찍이 15살 되던 해 송재공을 따라 안동에 갔을 때 술에 취해 말에서 떨어진 실수를 한 이래로 술에 대해 평생 근신하였다. 퇴계는 병약했으나 술은 즐기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는 퇴계가 만년에 도산서당에서 지은 시 중에 술에 관한 시가 서너 수 나오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퇴계는 직접 집 뒤의 산속에 술 빚는 창고를 두어 서당에 손님이 찾아오면 산봉우리로 불러 술을 마셨다고 한다.‘달밤에 이문량이 도산으로 찾아오다(月夜大成來訪陶山)’란 시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좋은 밤 함께 즐겁네
    좋은 손님들 찾아오니
    산봉우리 넘어 불러
    탁주잔 기울여 마시네
    관란헌에 셋이서 솥발처럼 앉아
    그윽한 마음 열고
    다시 난초 배에 올라
    달 놀이 하다 돌아왔네
    良夜同欣好客來
    隔岑呼取濁醪盃
    臨軒鼎坐開幽款
    更上蘭舟弄月回

이처럼 술을 좋아하던 퇴계였으나 평생 술을 절제하여 취하지는 않았다. 술에 대한 경각심을 퇴계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내가 처음으로 벼슬에 올라 서울에 있을 때에 늘 사람에 이끌려 날마다 술을 마시고 놀았다. 그러나 얼마 뒤 한가한 날에는 문득 심심한 마음이 들어서 돌이켜 생각해 보고는 부끄러워 어찌할 줄 몰랐다.

또 내가 일찍이 금문원(琴聞遠:제자))의 집에 놀러간 일이 있었는데, 산길이 몹시 험하였다. 갈 때는 말고삐를 잔뜩 잡고 조심스러워하는 마음을 놓지 않았는데, 돌아올 때는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길 험한 것을 아주 잊어버리고 마치 탄탄한 큰 길을 걷듯 하였으니, 마음을 잡고 놓음이 이처럼 심히 두려운 것이다.

퇴계의 두 번째 고백 역시 학문의 길은 몹시 험한 산길을 가는 것과 같으니, 항상 말고삐를 잡고 마음을 놓지 않아야 하며, 마치 탄탄한 큰길처럼 함부로 가면 낭패를 본다는 내용으로 제자들에게 내리는 경책이다.
실제로 퇴계는 오로지 한마음으로 정신 통일하는 심법에 홀로 매달린다.
심지어 퇴계는 한발짝 걸을 때마다 자신의 마음이 한걸음에 집중되는지 아닌지 혼자서 실험해 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얼핏 보면 이 발걸음 하나도 지극히 어려운 것임을 퇴계는 깨닫는다.

발걸음 하나가 습관적이거나 일상적이 되지 아니하고 마치 천지가 움직이는 것 같은 무게를 지니기 위해서는 한걸음 동안에 온 마음이 그곳에 실려 있어야 하는데, 한걸음 동안에 이미 만감이 교차하고, 나중에는 걷는다는 자의식이 생겨나 마음이 산란해지고 분열됨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나와 외계가 혼연일치되는 무심에 들어가는 것을 정진하듯 퇴계는 심법을 터득하기 위해서 이 독특한 걸음공부를 혼자서 연구하였던 것이다.

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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