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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도덕경(老子道德經)
오늘은 어제보다 더 난감하게 됐습니다. 주석서 없이 도덕경을 읽었는데 감히 '읽었다'고 말하기조차 부끄럽게 됐습니다. 말은 말인데 도무지 뜻이 와닿지 않은 말들로 온통 가득차 있었습니다. 책을 덮으니 오로지 '도'와 '덕'이라는 두 글자만 남았는데, 이 책 이전부터 이 말만큼 많이 들어온 말도 없거니와 이 말처럼 머릿속에 흐리멍텅하게 인식된 말도 없습니다.
제 목 : 노자도덕경
지은이 : 노자 / 황병국 옮김
펴낸곳 : 범우사 (초판 출간일 1986.6.20 / 2003.7.1일刊 초판 10쇄를 읽음) ₩2,800
대화를 하다보면 간혹 대명사를 많이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 '저것', '그러니까 그것이'... 이런 말을 많이 듣다가 보면 어느 것이 '이것'인지, 어느 것이 '저것'인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참으로 답답합니다. 내가 모르는 '이것'과 '저것'을 가지고 계속 얘길하니, 얘기가 겉돌 수밖에요. 정말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말의 흐름을 놓치고 맙니다.
내가 모르는 '이것'과 '저것'을 주어로, 목적어로 사용하고 있을 때 나는 대화 상대자와의 의사소통에 '단절'을 느낍니다. '도'와 '덕'에 대해 논한 《도덕경》을 읽으면서도 비슷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
此兩者同, 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설명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요,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무명은 하늘과 땅의 기원이요, 유명은 만물을 기르는 어머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늘 욕망에서 벗어나 있는 자만이 '묘'를 볼 수 있고, 결코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는 '요'밖에 볼 수 없다.
이 두 가지는 한 근원에서 나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을 달리한다.
이 근원을 우리는 '현'이라 부른다. 아니 오히려 '현'보다는 더한층 보기 어려운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모든 '묘'가 나오는 문이다.
제가 본 책에는 이렇게 해석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덕경의 난해함은 바로 해석이 분분하다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이런 해석도 있습니다.
도(道)를 도라 하면 참된 도가 아니요, 이름(名)을 이름이라 하면 참된 이름이 아니다. (...후략)
뭐, 어찌됐든 둘 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알듯말듯하다가도 결국에는 가슴에 남지 않습니다. 가슴에 남지 않는다는 말은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머릿속에만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하는 식으로 그 음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도덕경 81장 중의 첫 장, 요즘 책으로 말하자면 바로 서문 격에 해당하는데, 여기서부터 막히고 맙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도=진리'라는 말로 바꿀 수 있을텐데 (이렇게 바꿔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그 진리를 '말로 하기에는 불가능하다'고 처음부터 선포하고 시작하니 갑갑할 수밖에요.
법화경에도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 때, 세존께서 조용히 삼매에서 일어나시어 사리불에게 말씀하시기를 "여러 부처님의 지혜는 매우 깊어 헤아릴 수 없으며, 그 지혜의 문은 이해하기도 어렵고 들어가기도 어려워서 성문이나 벽지불이 능히 알 수 없느니라.... 사리불아 내가 성불한 이래로 갖가지 인연과 여러 가지 비유로 널리 교법을 펴며, 수 없는 방편으로 중생을 인도하여 모든 집착을 여의게 하였노라..." (방편품 앞 부분)
그 지혜의 문은 이해하기도 어렵고 들어가기도 어렵다(其智惠門 難解難入)고 처음부터 얘기하니,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러 온 사람들 중 많은 이들(자그마치 오천명)이 의심을 일으켜 그 자리에서 일어나 가버렸다고 합니다. 도덕경 81장 중 제1장을 두고 책장이 넘어가지 않아 덮어버리고 싶었던 제 마음과 다를 바 없습니다.
사리불이 대중을 대표해서 거듭 청하면서 왜 말해주지 않느냐고 하자 세존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수없는 방편과 갖가지 인연과 비유와 이야기로써, 법을 설하지만 이 법은 생각이나 분별로써 이해할 수 없으니, 오직 부처님들만이 아시느니라"
생각이나 분별로써 이해할 수 없다니, 이건 노자의 《도덕경》이나 《장자》에서 거듭하여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분별로써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결국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이름이 아니다(名可名 非常名)와 통합니다. 이름을 걷어내야만 참된 무언가를 볼 수 있다는 뜻이니까요.
또한 무욕해야만 '묘(妙)'를 볼 수 있다 합니다. 법화경의 정식명칭이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니, 그 묘한 법(妙法)과 묘한 도(道) 사이에서 무언가 손에 잡히지 않는 동질감이 느껴집니다. 그 동질감은 바로 진리(=道=法)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으니 얻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發心)을 가지고 구하라는 데 있지 않을까요.
갖가지 인연과 비유(방편)로 法을 말하지만 비유 자체가 법이 아니듯이, 道를 갖가지 비유로써 설명하고 있는 《도덕경》을 읽는 것만으로 道를 깨칠 수 있는 건 아닐 것입니다.
형체는 없지만 완전한 무엇이 있어 하늘과 땅보다 먼저 생겼다. 그것은 소리도 없고 텅 비어 있으며 짝도 없이 홀로 있다. 언제나 변함이 없고 어디든 안 가는 곳이 없건만 지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천하 만물의 어머니라 할 만하다. 우리는 그것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임시로 '도'라고 지어 부른다. (도덕경 25장)
아~ 정말 道란 무엇일까요?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난 왜 道가 무엇인지를 궁금해하는 것일까요?
도통 모르겠습니다.
제 목 : 노자도덕경
지은이 : 노자 / 황병국 옮김
펴낸곳 : 범우사 (초판 출간일 1986.6.20 / 2003.7.1일刊 초판 10쇄를 읽음) ₩2,800
대화를 하다보면 간혹 대명사를 많이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 '저것', '그러니까 그것이'... 이런 말을 많이 듣다가 보면 어느 것이 '이것'인지, 어느 것이 '저것'인지 알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참으로 답답합니다. 내가 모르는 '이것'과 '저것'을 가지고 계속 얘길하니, 얘기가 겉돌 수밖에요. 정말 주의 깊게 듣지 않으면 말의 흐름을 놓치고 맙니다.내가 모르는 '이것'과 '저것'을 주어로, 목적어로 사용하고 있을 때 나는 대화 상대자와의 의사소통에 '단절'을 느낍니다. '도'와 '덕'에 대해 논한 《도덕경》을 읽으면서도 비슷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無名 天地之始, 有名 萬物之母.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
此兩者同, 出而異名.
同謂之玄, 玄之又玄, 衆妙之門.
설명할 수 있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요,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영원한 이름이 아니다.
무명은 하늘과 땅의 기원이요, 유명은 만물을 기르는 어머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늘 욕망에서 벗어나 있는 자만이 '묘'를 볼 수 있고, 결코 욕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는 '요'밖에 볼 수 없다.
이 두 가지는 한 근원에서 나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을 달리한다.
이 근원을 우리는 '현'이라 부른다. 아니 오히려 '현'보다는 더한층 보기 어려운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모든 '묘'가 나오는 문이다.
제가 본 책에는 이렇게 해석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덕경의 난해함은 바로 해석이 분분하다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이런 해석도 있습니다.
도(道)를 도라 하면 참된 도가 아니요, 이름(名)을 이름이라 하면 참된 이름이 아니다. (...후략)
뭐, 어찌됐든 둘 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알듯말듯하다가도 결국에는 가슴에 남지 않습니다. 가슴에 남지 않는다는 말은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머릿속에만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하는 식으로 그 음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도덕경 81장 중의 첫 장, 요즘 책으로 말하자면 바로 서문 격에 해당하는데, 여기서부터 막히고 맙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도=진리'라는 말로 바꿀 수 있을텐데 (이렇게 바꿔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그 진리를 '말로 하기에는 불가능하다'고 처음부터 선포하고 시작하니 갑갑할 수밖에요.
법화경에도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그 때, 세존께서 조용히 삼매에서 일어나시어 사리불에게 말씀하시기를 "여러 부처님의 지혜는 매우 깊어 헤아릴 수 없으며, 그 지혜의 문은 이해하기도 어렵고 들어가기도 어려워서 성문이나 벽지불이 능히 알 수 없느니라.... 사리불아 내가 성불한 이래로 갖가지 인연과 여러 가지 비유로 널리 교법을 펴며, 수 없는 방편으로 중생을 인도하여 모든 집착을 여의게 하였노라..." (방편품 앞 부분)
그 지혜의 문은 이해하기도 어렵고 들어가기도 어렵다(其智惠門 難解難入)고 처음부터 얘기하니,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러 온 사람들 중 많은 이들(자그마치 오천명)이 의심을 일으켜 그 자리에서 일어나 가버렸다고 합니다. 도덕경 81장 중 제1장을 두고 책장이 넘어가지 않아 덮어버리고 싶었던 제 마음과 다를 바 없습니다.
사리불이 대중을 대표해서 거듭 청하면서 왜 말해주지 않느냐고 하자 세존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수없는 방편과 갖가지 인연과 비유와 이야기로써, 법을 설하지만 이 법은 생각이나 분별로써 이해할 수 없으니, 오직 부처님들만이 아시느니라"
생각이나 분별로써 이해할 수 없다니, 이건 노자의 《도덕경》이나 《장자》에서 거듭하여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분별로써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은 결국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이름이 아니다(名可名 非常名)와 통합니다. 이름을 걷어내야만 참된 무언가를 볼 수 있다는 뜻이니까요.
또한 무욕해야만 '묘(妙)'를 볼 수 있다 합니다. 법화경의 정식명칭이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니, 그 묘한 법(妙法)과 묘한 도(道) 사이에서 무언가 손에 잡히지 않는 동질감이 느껴집니다. 그 동질감은 바로 진리(=道=法)는 말로 표현하기에는 한계가 있으니 얻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發心)을 가지고 구하라는 데 있지 않을까요.
갖가지 인연과 비유(방편)로 法을 말하지만 비유 자체가 법이 아니듯이, 道를 갖가지 비유로써 설명하고 있는 《도덕경》을 읽는 것만으로 道를 깨칠 수 있는 건 아닐 것입니다.
형체는 없지만 완전한 무엇이 있어 하늘과 땅보다 먼저 생겼다. 그것은 소리도 없고 텅 비어 있으며 짝도 없이 홀로 있다. 언제나 변함이 없고 어디든 안 가는 곳이 없건만 지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천하 만물의 어머니라 할 만하다. 우리는 그것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임시로 '도'라고 지어 부른다. (도덕경 25장)
아~ 정말 道란 무엇일까요?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난 왜 道가 무엇인지를 궁금해하는 것일까요?
도통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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