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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목의 독서노트

장자(莊子)

난감합니다. 장자가 늘어놓은 이야기를 부담 없이 읽었으나, 책을 덮으니 정작 '도'와 '무위'와 '무용' 외에 머릿속에 남아있는 단어가 없습니다. 고전을 아무런 도움 없이 날로 읽는다는 것이 정말 쉽지 않습니다. 그나마 우언을 곁들여 말을 길게 풀어놓은 점에서 노자의 '도덕경'보다는 쉽다(?)는 것으로 스스로 위안을 합니다.
어렵지만 제가 이해한 범위 내에서 몇 글자 적어보겠습니다.


   제   목 : 장자
   지은이 : 장자 / 허세욱 옮김
   펴낸곳 : 범우사 (초판 출간일 1986.4.30 / 2003.9.15일刊 3판 1쇄를 읽음) ₩2,800

《장자》는 총33편으로 크게 내편(內篇)과 외편(外篇), 잡편(雜篇)으로 나누는데, 이 가운데서 장자의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내편(內篇) 7편으로, 여기에 나타난 중심 사상이 부연된 것이 외편 15편과  잡편 11편이라고 합니다. 제가 본 범우사 문고판 《장자》는 내편 7편을 담고 있습니다.

장자가 보기에는 모든 지식은 상대적인데, 도를 통달한 사람만이 그 상대적인 것을 극복하여 '이'와 '그'의 차별이 없는 만물제동(萬物齊同)의 절대 무차별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고 합니다.
이를 좀 더 세분화하여 지혜에 등급을 매기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Level 1 : 천지만물을 잊고 우주간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경지입니다. 너무나 높은 경지여서 장자 또한 여기에 더 이상 첨가할 말이 없다고 합니다.
Level 2 : 사물은 존재하지만 사물 사이에 분별이 없다고 보는 경지입니다.
Level 3 : 사물 사이에 분별은 있지만,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는 시비 관념이 존재하지 않는 경지입니다.
이 아래 단계는 시비의 분별이 생기는 단계인데 이미 이때는 도(道)가 붕괴하고, 도가 사라지므로 정욕이 사사롭게 돋아나게 된다고 합니다.

장자가 세상을 보는 잣대는 아마 눈금 간격이 엄청나게 큰 초대형 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눈금이 촘촘한 자로 세상를 보는 범인의 시시비비는 장자의 초대형 자로 보자면 하나의 눈금도 차지하지 않으므로 시시비비의 분별이 없다는 뜻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억지로라도 '만물은 하나다'라고 스스로 세뇌를 계속하면 최소한 Level 2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지 않을까요? 시비의 분별이 생길 때마다 '이 차이는 사실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계속 반복 훈련하면 되지 않을까요? 장자는 저와 같은 놈이 나타날까 미리 경계하여 이렇게 미리 말해두었습니다.
"만일 노심초사하여 억지로 만물을 하나로 보려고 한다고 해서 만물제동의 섭리를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것을 조삼(朝三)이라 한다."
도를 억지로 알려고 해서 알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그 경지에 다다를 수 있을까요. 7편의 글을 모두 읽어봐도 도무지 그 방법은 보이지 않습니다.

《장자》 전편이 그러하듯 장자가 풀어놓는 얘기보따리 속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야할 것 같습니다.

장자의 얘기, 몇 개만 짤막하게 옮겨 보겠습니다.

#1 〈소요유逍遙遊〉에서
혜자와 장자의 대화. 장자의 말은 정작 세상에서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볼품 없고 쓸모 없는 나무와 같다고 빗대어 말하자, 장자가 하는 말.
"(...) 쓸모가 없기에 그 나무엔 도끼가 덤빌 염려도 없고, 누구도 해치려 들지 않을 겁니다. 쓸모 없다는 것이 어찌 근심거리가 된단 말입니까?"

#2 〈제물론齊物論〉에서 (너무나 유명한 호접지몽胡蝶之夢)
장자가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그 속에서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다녔다. 꿈에서 깨어보니 그제서야 스스로 형체가 있는 '나'인줄 알았다. 도대체 장자가 나비 꿈을 꾼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장자가 된 꿈을 꾼 것이, 꿈 속에서 서로의 관계는 애매해진다.

#3 〈인간세人間世〉에서
안자가 어지러운 위나라의 불쌍한 백성을 위해 할일을 찾아 떠난다고 고별 인사를 하자 공자가 한 말 중에서.
"마치 길에 나서지 않는 것은 쉬운 일이나, 길을 다니면서도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은 어려운 것과 같다."

#4 또 〈인간세人間世〉에서
산 나무는 더러 도끼 자루 되어 스스로 나무를 자르고, 기름덩이는 더러 불길 불러 스스로 몸을 태운다. 계수는 먹이가 되기에 베이고, 칠은 칠하는 데 쓰이기에 베인다.
사람들은 모두 유용한 것의 용처는 알면서도 무용한 것의 용처는 모르고 있다.

#5 〈덕충부德充符〉에서
"자연 만물을 관찰할 때 서로 다른, 차별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간과 쓸개는 초나라와 월나라처럼 상배되어 있고, 다시 서로 같은 입장에서 본다면, 만물은 모두 한덩이로 되어 있는 것이다."

#6 또 〈덕충부德充符〉에서
성인은 모든 세속을 버리고 지극히 공허한 곳에서 노니는 것이다. 따라서 지혜를 그루터기에서 돋은 싹처럼 쓸모 없는 걸로 보고, 예의를 아교풀처럼 사람을 속박하는 걸로 보고, 덕혜(德惠)를 사람과 사람 사이를 얽어매는 걸로 보고, 공교로운 기술은 기껏해야 이(利) 끝을 다투는 장사(商)에 쓰이는 것으로 보았다. (...)
성인은 사람의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사람의 욕정은 없고, 사람의 형태를 갖추고 있기에 인류와 더불어 사회를 이루지만, 사람의 욕정이 없기에 시비의 갈등이 그를 엄습할 수 없다.

#7 〈대종사大宗師〉에서
옛적에 진인(眞人)은 잘 때는 꿈을 꾸지 않았고, 깨었을 때엔 근심이 없었고, 먹을 때엔 단맛을 탐내지 않았고, 호흡은 깊고 가라앉아 있었다.

#8 또 〈대종사大宗師〉에서
샘물이 마르자 고기들은 모두 육지에 나와 몸을 비비 꼬면서 입김을 불어 대는가 하면 물거품으로 몸을 적시고 있다. 그것이 기특하지만 결코 호수에서 서로가 서로를 잊는 것처럼 좋은 것은 아니다.

책을 다시 훑어보니, 전혀 모르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이 말은 결국 모른다는 말과 같습니다. 장자가 말하고자하는 바가 너무 크고, 그를 받아들이기에 제가 너무 작은 탓이라 생각합니다.

아직까지는 무용보다는 유용을, 욕정이 없음보다는 치열한 고민과 정열을, 길을 나서지 않음이 아니라 길을 나서되 나의 걸음을 똑바로 하며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욱 강한 때문일 것입니다. 아직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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