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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선생의 동양고전 독법,《강의》
일전에 아는 분이 제게 작년에 읽은 책 중에서 무엇이 으뜸이냐고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기억력이 평균 이하인 저는 작년에 읽은 책들이 무엇인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는데, 선뜻 그 답을 못한 제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러나 만약 올해가 지나가고 다시 이와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이번에는 단연코 신영복 선생의 《강의》가 그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 목 :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지은이 : 신영복
펴낸곳 : 돌베개 (초판 출간일 2004.12.13 |2004.12.27일刊 초판 2쇄를 읽음) ₩18,000
근 일주일을 이 책과 씨름하며 지냈습니다. 평일의 온전한 시간을 모두 바칠 수 없는 상황에서 신영복 선생의 이 책은 책 읽는 기쁨과 고통을 동시에 안겨주었습니다. 대개 이틀 간격으로 책을 읽고 정리해왔는데 이 책은 도무지 쉬이 진도가 나가지 않을 뿐 아니라, 겨우겨우 책을 덮고 난 지금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당황스럽기만 합니다.
시경,서경,초사,주역,논어,맹자, 노자,장자,묵자,순자,한비자,대학,중용,불교와 신유학 등 이 책이 다루는 내용이 실로 광범위한데다, 신영복 선생의 삶의 무게가 느껴지는 독법讀法에 감탄하여 혀만 내두를 뿐 감히 무엇을 옮겨 적을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처음부터 다시 정독을 한 다음 정리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으나, 그렇게 한다고 해도 지금보다 월등히 더 나아지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내 삶이 아직 그만한 무게를 지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저 젊은 날에 이런 책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을 행운이라고 여기며 위안해야겠습니다.
선생께서 이 책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핵심은 이미 서론에서 분명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고전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관점'인데, 고전 독법은 과거의 재조명이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고전의 예시문은 과거를 재조명하고 그것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선별한 것들입니다. 또한 고전을 강독함에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화두話頭를 걸어놓고 진행하는데, 그것이 바로 '관계론關係論'입니다. 유럽 근대사의 구성 원리가 근본에 있어서 '존재론存在論'임에 비해 동양의 사회 구성 원리는 '관계론'이라는 것이 요지입니다. 말이 어려운 듯 느껴지나 책을 읽다보면 선생이 말하는 그 관계론이 무엇인지 '느끼게' 됩니다. 주체로서의 인간과 대상으로서의 자연, 본질과 현상, 물질과 의식을 나누어 생각했던 사고방식의 모순을 알게 되고, 그런 철학적 인식은 필연적으로 현대의 주류 담론인 초국적 신자유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됩니다. 이에 대한 반성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실천적 관점이 바로 신영복 선생의 고전 독법의 시작 - 바로 참여점(entry point)입니다.
책 속의 많은 말들을 옮기고 싶으나, 전후 문맥을 충분히 설명치 아니하고 그 부분만 떼어내는 것은 선생이 말하고자 하는 그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할 것 같고, 전후 문맥을 설명하자니 그것은 또한 이 책을 그대로 옮기는 행위에 다름 아니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리뷰를 마쳐야할 것 같습니다. 게다가 출근 시간이 코 앞이라 황망히 일어나야 할 때이기도 하고...
좋은 사람이 생기면 그를 자주 바라보게 되듯이 좋은 문장을 발견하면 눈이 따라가고 마음이 움직이게 됩니다. 나를 돌아보게 하고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어 암기하고 싶게 됩니다. 이 책은 그런 문장들로 밭을 이루고 있습니다. 비록 500 페이지가 넘는 분량이기는 하지만 두고두고 간직하며 곱씹어볼 수 있는 책이니 많은 분들께 일독을 권합니다.
*
이 책은,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이 창간되던 2001년 9월 24일에 시작하여 2003년 4월 7일까지 장장 166회에 걸쳐 연재한 <신영복 고전강독>을 엮은 것입니다.
다음 링크를 클릭하면 그 전문을 보실 수 있습니다.
☞ 프레시안에 연재한 <신영복 고전강독> 원문 보기
그러나 만약 올해가 지나가고 다시 이와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이번에는 단연코 신영복 선생의 《강의》가 그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 목 : 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지은이 : 신영복
펴낸곳 : 돌베개 (초판 출간일 2004.12.13 |2004.12.27일刊 초판 2쇄를 읽음) ₩18,000
근 일주일을 이 책과 씨름하며 지냈습니다. 평일의 온전한 시간을 모두 바칠 수 없는 상황에서 신영복 선생의 이 책은 책 읽는 기쁨과 고통을 동시에 안겨주었습니다. 대개 이틀 간격으로 책을 읽고 정리해왔는데 이 책은 도무지 쉬이 진도가 나가지 않을 뿐 아니라, 겨우겨우 책을 덮고 난 지금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당황스럽기만 합니다.시경,서경,초사,주역,논어,맹자, 노자,장자,묵자,순자,한비자,대학,중용,불교와 신유학 등 이 책이 다루는 내용이 실로 광범위한데다, 신영복 선생의 삶의 무게가 느껴지는 독법讀法에 감탄하여 혀만 내두를 뿐 감히 무엇을 옮겨 적을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마음 같아서는 처음부터 다시 정독을 한 다음 정리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으나, 그렇게 한다고 해도 지금보다 월등히 더 나아지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내 삶이 아직 그만한 무게를 지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저 젊은 날에 이런 책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을 행운이라고 여기며 위안해야겠습니다.
선생께서 이 책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핵심은 이미 서론에서 분명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고전을 읽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관점'인데, 고전 독법은 과거의 재조명이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고전의 예시문은 과거를 재조명하고 그것을 통해 현재와 미래를 모색하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선별한 것들입니다. 또한 고전을 강독함에 있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화두話頭를 걸어놓고 진행하는데, 그것이 바로 '관계론關係論'입니다. 유럽 근대사의 구성 원리가 근본에 있어서 '존재론存在論'임에 비해 동양의 사회 구성 원리는 '관계론'이라는 것이 요지입니다. 말이 어려운 듯 느껴지나 책을 읽다보면 선생이 말하는 그 관계론이 무엇인지 '느끼게' 됩니다. 주체로서의 인간과 대상으로서의 자연, 본질과 현상, 물질과 의식을 나누어 생각했던 사고방식의 모순을 알게 되고, 그런 철학적 인식은 필연적으로 현대의 주류 담론인 초국적 신자유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됩니다. 이에 대한 반성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실천적 관점이 바로 신영복 선생의 고전 독법의 시작 - 바로 참여점(entry point)입니다.
책 속의 많은 말들을 옮기고 싶으나, 전후 문맥을 충분히 설명치 아니하고 그 부분만 떼어내는 것은 선생이 말하고자 하는 그 뜻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할 것 같고, 전후 문맥을 설명하자니 그것은 또한 이 책을 그대로 옮기는 행위에 다름 아니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리뷰를 마쳐야할 것 같습니다. 게다가 출근 시간이 코 앞이라 황망히 일어나야 할 때이기도 하고...
좋은 사람이 생기면 그를 자주 바라보게 되듯이 좋은 문장을 발견하면 눈이 따라가고 마음이 움직이게 됩니다. 나를 돌아보게 하고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어 암기하고 싶게 됩니다. 이 책은 그런 문장들로 밭을 이루고 있습니다. 비록 500 페이지가 넘는 분량이기는 하지만 두고두고 간직하며 곱씹어볼 수 있는 책이니 많은 분들께 일독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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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이 창간되던 2001년 9월 24일에 시작하여 2003년 4월 7일까지 장장 166회에 걸쳐 연재한 <신영복 고전강독>을 엮은 것입니다.
다음 링크를 클릭하면 그 전문을 보실 수 있습니다.
☞ 프레시안에 연재한 <신영복 고전강독> 원문 보기
부록

댓글 8
프레시안에 연재되던 신영복 선생의 글을 보고
이거 출판하자고 윗사람에게 제의했던 적이 있었어요.
물론 퇴짜맞았죠.
그때는 서운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오히려 잘 된 것 같네요.
책마다 어울리는 출판사가 있는 법이니까.
그런데 '시경'까지밖에 못 읽은 지금 '서론'에 대한 부연 이상을 읽어내지 못하겠습니다. 워낙 방대한 주제를 다루려고 해서 그럴 수 있겠지만, 신영복식 '관계론으로 고전 읽기' 이상을 보여주지 못하는 건 아닐까 싶네요. 물론 동양식 '관계론'이라는 탈근대의 해법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지겠지만 말입니다.
두 가지 우문이 남습니다. 치열한 운동가들일수록 노년에 고전의 세계에 빠져 재해석 작업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감옥에서 쓰여진 그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과 '엽서' 를 제외하고는 초기의 살을 에는 표현과 날선 통찰들이 잘 드러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 이 질문에서는 강준만의 표현처럼 리영희 선생이 조,중,동에서 소비되어지는 것처럼 '강의' 역시 모든 일간지 북리뷰에 소개될 정도로 소비되어지는, 딱 그 정도의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드는군요.
항상 좋은 글을 통해 공부하게 됨을 감사하며.
우선 저는 개인적으로 과거에 치열하게 운동해본 적이 없어서 그분들의 '변화'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그냥 이런 생각은 해봤었습니다.
우선 현실이 바뀌면서(뭐, 근본적으로 안 바뀌었다고 해도 할 말은 없지만요) '현장'에서 다소 거리를 두고 있는 '과거 운동가'들에 한정해야 한다는 겁니다. 살을 에는 표현과 날선 통찰은, 날선 대립의 현장에서 가능한 표현이고 그 현장성을 몸으로 느낄 때만 가능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오독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과거의 치열한 운동가들은 모두 현재는 그 운동으로부터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있는 분들이 아닌지요. 그래서 과거 '외부'와의 날선 대립의 최선봉에 섰다가, 지금은 '내면'을 돌아보며 또 지금으로서 최대한의 대립의 각을 세우고 있는 건 아닌지요. 그 대립의 대상이 외부에서 내부로 바뀐 건 아닌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습니다.
또한 '민족주의'는 본질상 자본과 노동, 지배와 피지배 계층이 모두 공감하는 탈 계급적 공통 분모를 가지고 있는 사상인 바, 그 실천 행동이 급急하지 아니하고 완緩한 상태라면 어느 누구나 제 것인양 차용할 수 있는 소지가 있다고 봅니다. 리영희 선생이 조중동에서 소비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사상적으로 보자면 과거보다 더 어렵고 힘든 현실입니다. 극한의 대립 상황이 없거나 또는 만들 수 없는 상황이니, 과거처럼 명확한 선악善惡의 기준을 만들기도 어렵고, 해서 보다 중층적인 고민을 하게될 수밖에 없는 현실인 것 같습니다. 몰론 과거나 지금이나 한 번도 대립의 최전선에 나선 적이 없는 저로서는 이런 말을 할 자격이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리영희 선생이든, 신영복 선생이든, 박노해 씨든, 제가 감히 할 수 없던 일들을 했던, 그리고 지금도 과거와의 반성과 단절로부터 치열한 내적 고민을 하고 계실 분들에게는 오로지 경외敬畏의 마음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살을 애는('에는'이 아니라) 표현과 날선 통찰" 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아마도 그만큼 유연해졌고, 겸손해졌음을 의미하는 걸께고...이런 걸 두고 학창시절에는 개량화다 변절이다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만 그거야말로 어리석음의 소치였을 뿐.
김지하의 시집 <애린>을 보며 평론가 채광석이 "직선에서 곡선으로" 발전한 것이라 했던 말이 생각난다. 내 생각에 그들은 병목이 말처럼 치열한 삶의 현장 혹은 운동의 현장을 빗껴서 있기 때문에 자신의 트랜드를 상실한 게 아니라 직선의 곧음 보다 더 강력한 운동의 무기로서 적들(조중동 등)까지 포괄할 수 있는 보다 고양된 운동의 방법인 곡선의 방법론을 터득한 게 아닐까 싶은데... 물론 개중에는 변절자들도 섞여 있겠지만...
아무튼 네 사이트에서 이런 논의가 시작된 건 퍽 다행이고 즐거운 일이다.
신영복 선생님의 신작 강의를 정독 해보신다면 님이 가지고 계신 몇몇 의문이 풀리지 않을까 해요
관계론으로 고전읽기란 말은 맞지 않다고 봅니다.
실체가 있고 그 이름은 나중에 붙지만, 이름이 그 실(實)을
다 온전히 들어 낼수는 없지요.
그런 의미에서 관계론이라는 이름의 실체는 무엇인가?
이것을 먼저 생각해 보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합니다.
그리고 그 책에는 저자의 세심한 배려로 관계가 무엇인지
그 실체를 독자들에게 가리키고 있지요.
그 손가락(名)을 보지 마시고 달(實)을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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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우문에 달아주신 답변들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여전히 몇몇 분들의 조언과 지적에도 불구하고, 논어편까지 읽은 지금 저는 '서론이 핵심인 책이다'라고 다른 이들에게 소개해주고 싶네요. 그리고 '논어'나 '장자', '도덕경'이 읽고 싶어하는 이가 있다면 원전을 권하고 싶네요. 신영복 선생의 책들을 읽어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면 가격과 시간대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애장판으로는 '엽서'를, 선물용으로는 '나무야 나무야'를 권하겠습니다.
박재교님의 지적이 뭘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이 책을 통해 사람들이 접하게 되는 건 '달'이라기 보다는 '달에 대한 신영복의 목소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사람들이 이 책을 대할 때 달을 보려 하기보다는, '왜 신영복은 손가락을 들어 달을 가리키고 있는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하는 '행위'를 읽는 게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습니다.
신영복 선생의 강의는 사실 별로 인기가 없지 않았나요? 프레시안을 드나드는 사람치고 한 두번 안 읽어본 사람은 없겠지만, 꾸준히 읽어대는 열혈독자가 '더불어 숲' 연재에 비해 더 떨어졌다고 여겨집니다.
저는 신영복 선생의 글이 갖는 매력은 '강의' 보다는 '일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인 스스로는 대중을 위해 풀어쓰고 있지만 오히려 자기 스스로 정리하기 위해 쓴 글들이 있다면 더 주옥같은 문장들이 많아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비로소 소비'하려'하기 보다는 애독'하게'될 것 같습니다.
손이사님/ "리영희 선생이 조중동에서 소비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나 싶습니다." 앞 부분까지는 이해가 가겠는데 이 부분에서 갸우뚱해집니다. 시간나실 때 설명을 좀더 붙여주실 수 있으신지요?
시라노님/ 곡선의 방법론을 읽을 때 이야, 싶었는데 구체적으로 잡히질 않습니다. 신영복 선생의 사고가 어떤 지점에서 적들까지 포괄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지를 좀더 들어보고 싶습니다. ^^
박재교님/ 오독을 이름으로 걸고 있는 사람에게 '정독'하면 알 수 있지 않을까?라는 표현은 어째 ^^c 님이 보신 실체에 대한 이야길 좀더 풀어주시며 방향을 제시해주십사 부탁드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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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말씀드리려고 했던 것은 이런 것입니다.
비록 지식인들이 과거에 비해 결국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다고 하는 말들을 자주 하지만, 실제로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국민들의 의식이 과거 냉전 시대에 비해 근본적으로 달라진 건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도 주류는 바뀌지 않았어, 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아닙니다. 작년 삼일절에 보수단체(실제로는 수구단체인) 140여개 단체 3만여명이 시청앞에서 집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작년에는 아마도 이런 일이 몇 번 있었을 것입니다. 이 현상을 달리 보면 '한국의 우익이 이제 운동으로 존재하는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옛날 군사정권 시절에는 폭력에 의해서 뒷받침되던 것들이 지금은 좀 달라졌구나. 운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우익의 세가 그만큼 약해졌구나,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저는 실제로 변했다고 봅니다.
이렇게 변한 환경에서는, 과거 리영희 선생께서 말씀하신 것들 중에서 과거에는 급急한 주장이라고 여겨졌던 것들이 상대적으로 조중동에서도 받아들일만큼 완緩한 주장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계급의 문제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 문제를 말할 때는 그렇게 받아들일 여지가 충분히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비단 이런 시대적 상황 뿐만 아니라, 리영희 선생께서 몇 년 전에 뇌출혈(?)로 쓰러지신 이후에 간혹 말씀하신 것 중에는, 문맥의 흐름을 무시하고 몇 문장 골라내면 조중동에서 좋아할만한 말들도 꽤 있다는 것입니다. 일례로 작년 언젠가 말씀 하신 것 중에, 실제 내용을 보면 보안법이 통용되는 남한이 아직 미개사회라는 말이 주主였음에도 신문의 제목에는 "남보다 북이 먼저 변해야한다"는 식으로 뽑았던 것이 기억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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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리영희 선생의 글이나 말이 실제 조중동에서 소비되는 것을 보지 못한 제가 '그럴 수도 있다'라고 추측한 이유를 설명드린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소비되는지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 격이 된 것 같습니다.^^